본문 바로가기
전통/예술과 문화

착호갑사_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

by cocolivingdiary 2025. 12. 7.
반응형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009305&menuNo=200018 EBS_동물_포유류_0226

 

조선시대, 한반도는 호랑이가 깊은 산림은 물론 인가 근처까지 빈번하게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이른바 호환이 끊이지 않는 땅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호랑이가 인왕산과 백악산은 물론 궁궐에까지 나타났다고 하니 실제 피해는 실로 상상을 초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선 왕조는 호환에 전문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특수 목적의 군사 조직을 창설했으니, 그것이 바로 '호랑이를 잡는 갑사'라는 뜻의 착호갑사(捉虎甲士)이다.

 


 

 

# 착호갑사 국가가 주도한 호랑이 사냥

호환으로 인한 인명 피해와 가축 손실이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호랑이가 수도 한양과 궁궐 근처까지 출몰하여 왕실의 안전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선 왕조는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인식하고 중앙 정부 차원에서 전문적인 호랑이 사냥 부대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꼈다.

 

_착호갑사의 등장

기록상 '착호갑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태종 16년(1416)이다. 이 당시 경상도에서 '착호갑사'를 사칭하여 군마를 동원해 호랑이를 잡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착호갑사가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착호갑사는 국왕의 친위대인 갑사(甲士) 중에서 선발되어 호환 발생 시 해당 지역에 파견되는 임시 조직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는 시험을 통해 선발되는 정예 직업 군인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호환 피해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상설 전문 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착호갑사가 정식으로 조직 체계를 갖추게 된 것세종 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 3년(1421), 국왕을 호위하는 일반 갑사와는 별도로 착호갑사 정원 20명을 선발하여 공식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호환 발생 시 즉각 투입될 수 있도록 상시 운영되었으며 호랑이 5마리 이상을 잡으면 승진시켜주는 등 명확한 포상 규정도 마련되었다.


착호갑사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점차 증대되어 그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세종 7년에는 80명, 세종 10년에는 90명으로 늘어났으며, 세조 14년(1468)에는 200명으로 증원되었다.

 

마침내 성종 대에 완성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총 440명의 착호갑사 정원이 명시되어 국가의 정식 군사 조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 호랑이 사냥꾼을 뽑다

호랑이는 당대 가장 위험한 맹수였으므로, 착호갑사는 일반 군인이 아닌 최정예 인력으로 구성되었다.

 

선발의 기준은 까다로웠지만 그에 걸맞은 예우가 뒤따랐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발 방식은 달라졌지만 갑사 중에서 차출한다는 원칙은 변함없었다.

초기에는 목숨을 걸고 맹수와 싸워야 하는 임무의 특성상 무엇보다 용맹성이 중요시되었으나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자 활쏘기와 창술 중 한 가지에 능한 자를 우선 선발했다.

이후에는 실질적인 사냥 능력을 중시하여, 호랑이나 표범이 많이 출몰할 때 자원자에게 무기를 주고 먼저 잡게 하여 그 실적에 따라 충원하기도 했다.

 

시험 과목은

  • 보사(步射)_ 걸어가며 활쏘기
  • 기사(騎射)_ 말 타고 활쏘기
  • 기창(騎槍)_ 말 타고 창쓰기
  • 주(走)_ 달리기
  • 력(力)_ 힘쓰기
    등 다양한 무예와 신체 능력을 평가했다.

 

예를 들어 보사의 경우 180보 거리에서 나무 화살(木箭) 3발 중 1발 이상을 맞추거나, 130보 거리에서 편전(片箭, 애기살) 3발을 쏘는 식이었다.

 

다만, 활이나 창으로 직접 호랑이 2마리 이상을 잡은 자는 시험을 면제하고 바로 임명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착호갑사는 갑사 신분으로서 일반 병역 의무자보다 나은 급료와 대우를 받았다.

 

호랑이 사냥이라는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기에 추가적인 혜택이 주어졌는데 세종 대에는 호랑이 5마리 이상을 잡으면 승진의 기회가 주어졌고 조선 후기 훈련도감 등의 착호 활동에서는 잡은 호랑이의 크기와 사격한 순서(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에 따라 삼베, 무명, 모시 등 현물 포상이 차등 지급되었다. (우리역사넷_호랑이_사냥_포상)

 

개인적으로 호랑이를 잡아 바친 경우에도 포상이 있었으며, 정식 군인이 되기를 기다리는 대년군(待年軍)은 즉시 정규군(원군)으로 임용되는 특혜도 주어졌다.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착호갑사는 성종 대에 북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徙民)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호랑이 사냥을 위한 조직적인 군사 작전과 다양한 기술

착호갑사의 활동은 단순한 사냥이 아닌, 체계적인 군사 작전의 성격을 띠었다.

 

호환 발생 시 중앙에서 파견된 착호갑사는 해당 지역의 군사와 말을 동원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대규모 몰이 사냥이었다. 수십, 수백 명의 군사와 몰이꾼들이 포위망을 좁혀 호랑이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넣으면, 착호갑사들이 활과 창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방식이다.


호랑이 사냥에는 다양한 장비와 기술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때로는 함정이나 덫을 사용하여 호랑이를 생포하거나 사냥하기도 했다.


_활(弓)과 창(槍)

총포가 도입되기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사냥 무기였다.

 

특히 활은 원거리에서 제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창은 근접전이나 몰이 사냥의 마지막 일격에 사용되었다.

 

활쏘기와 창술 실력은 착호갑사 선발의 주요 기준이기도 했다.

 

창은 외발창, 이지창, 삼지창 등 다양한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말을 타거나 겨울철 산간에서 썰매를 타고 창으로 사냥하기도 했다.


_함정(陷穽)과 함기(檻機)

땅에 구덩이를 파고 창을 꽂아 위장하는 정창(阱槍) 방식의 함정 또는 나무 우리 형태의 덫인 함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함기는 호랑이가 안에 들어가면 문이 닫히는 구조로 '벼락틀'이라고도 불렸다

 

는 호랑이를 생포하거나 가죽 손상 없이 잡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대규모 인원 동원 없이 설치할 수 있어 민폐를 줄이는 효과도 있어 조선 정부는 함기 설치를 적극 권장했다.

 

  • 노도
    탄력 있는 나무 끝에 칼날을 달아 동물이 건드리면 칼날이 튀어나와 찌르는 방식의 덫이다.
    민간에서는 '선우'라고도 불렀으며 다산 정약용은 포수 동원으로 인한 민폐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노도 설치를 권장했다.
  • 그물
    호랑이를 잡는 큰 그물인 호망(虎網)도 사용되었다.
    몰이 사냥 시 포위망으로 쓰거나, 동굴 앞에 쳐놓고 잡는 방식, 또는 왕의 행차 시 안전을 위해 주변에 설치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 총포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도입되면서 호랑이 사냥의 대표적인 무기가 되었다.
    비록 초기 조총은 명중률이 낮고 장전 시간이 길었지만, 점차 활과 창을 대체하며 조선 후기 착호 활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역사적 변천_중앙군에서 지방군_그리고 5군영 체제로

착호갑사는 조선 전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그 역할과 조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모했다.


조선 전기는 착호갑사가 중앙군 소속의 정예 부대로서 체계를 갖추고 활약했던 시기이다.

특히 세종 대에 조직이 정비되고 인원이 확충되었으며, 성종 대 『경국대전』에 법제화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군사 제도 전반에 큰 변화가 생겼다.

중앙군인 오위 체제가 약화되면서 착호갑사 제도 역시 점차 축소되거나 유명무실해졌을 가능성이 컸으며 착호갑사는 16세기를 정점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호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호랑이 사냥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했다.

 

중앙의 착호갑사가 쇠퇴하면서 그 역할은 점차 지방군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해안가의 국마(나라에서 사용하는 말)를 기르는 목장에 피해가 심각해지자 태종 대부터 호환 발생 시 해당 지역 수령이 먼저 군사를 동원해 대처하고 사후 보고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지방에서 호랑이 사냥을 위해 동원된 군사들을 착호군(捉虎軍)이라 불렀다.

 

착호군은 각 도의 절도사가 자원자를 모집하거나 무예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편성했으며 호환 발생 시 수령의 지휘 아래 동원되는 예비 부대의 성격을 가졌다.

 

평안도의 경우 조선 후기에는 감영(조선시대 각 도의 행정을 총괄하던 감찰사) 소속의 착호군 규모가 5천 명에서 1만 1천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는 군역 부담이 가볍다는 점도 작용하여 가능한 일이 였다.

 

조선 후기에는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5군영(五軍營) 체제가 확립되면서 도성과 경기 지역의 착호 활동은 이들 군영 소속의 포수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은 각각 담당 구역을 나누어 호랑이 사냥을 수행했으며 체계적인 포상 규정을 마련하여 활동을 독려했다.

 

이 시기 착호 활동은 백성 보호 외에도 왕릉 주변의 안전 확보 및 국왕 능행 시의 경호 목적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 착호갑사의 의의

착호갑사의 존재는 조선시대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여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호환이라는 심각한 자연재해로부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2. 단순 전투 병력이 아닌 특정 위협(호랑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도의 전문 기술과 용맹함을 갖춘 특수 부대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 목숨을 걸고 맹수와 싸워야 했던 착호갑사는 당대 사회에서 용맹함과 뛰어난 무예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4. 이는 당시 한반도의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과 호랑이라는 강력한 포식자가 공존하며 벌였던 치열한 생존 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이다.

 


 

 

착호갑사는 조선시대 호환이라는 특수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탄생한 전문 사냥 부대였다. 태종 대에 시작되어 세종 대에 체계화되고 성종 대에 법제화된 이 조직은 조선 전기의 안정과 백성 보호에 기여했다. 비록 시대의 변화와 함께 중앙 조직은 쇠퇴했지만, 호랑이 사냥의 필요성은 지방의 착호군과 후기 5군영의 착호분수로 이어지며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착호갑사의 역사는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국가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인간과 맹수 간의 치열했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