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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본문

전통/건축

조선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cocolivingdiary 2025. 8. 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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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출처 [경기도청][공공누리(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37037&division=im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단순한 성곽 건축물이 아니다. 이는 18세기 조선의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왕의 정치 철학을 구현한 입체적인 계획도시다.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본질은 낡은 정치 질서를 개혁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정조의 국가 경영 청사진이었다. 화성은 당대 최고의 과학 기술, 합리적인 도시 설계, 그리고 백성을 중심에 둔 애민(愛民) 정신이 완벽하게 결합된, 시대를 앞서간 도시 모델의 원형이다.

# 수원화성을 계획하다

화성 건설의 가장 핵심적인 동기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정조는 수도 한양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왕이 직접 주도하는 국정 개혁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배후도시가 필요했다.

 

_정치적 목적과 '제2의 수도' 구상

정조는 실학자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팔달산 일대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삼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이자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조는 이곳을 단순한 행정도시를 넘어, 훗날 아들(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어 머물 '제2의 수도'로 구상했다. 상왕으로서 군사통수권, 사법권, 인사권을 장악하고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원대한 장기적 포석이었다. 이를 위해 수원의 행정 등급을 파격적으로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초대 유수로 자신의 최측근이자 재상이었던 채제공을 임명하여 프로젝트에 절대적인 힘을 실어주었다.

 

_효(孝)의 실천과 명분

이러한 거대한 계획의 명분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였다. 하지만 정조의 효는 단순히 묘를 옮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효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고,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복권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사도세자가 즐겨 입던 군복을 입고 행차했으며, 아버지가 정리한 무예 18기에 6기를 더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화성 축성은 이러한 정조의 효를 실천하고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실학과 과학으로 만들어진 도시

둘레 5.7km에 달하는 거대 도시를 불과 2년 9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동력은 실학(實學) 사상에 기반한 과학 기술이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동서양의 기술을 집약하여 도시 건설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_동서양의 혁신 기술의 도입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는 최소한의 힘으로 수만 근의 석재를 들어 올리는 혁신을 가져왔다. 이는 공사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_벽돌의 등장과 발전

전통적인 화강암과 더불어, 규격화가 용이한 벽돌을 대대적으로 사용하여 건축의 속도와 견고함을 동시에 확보했다. 이는 서북공심돈과 같은 독창적인 시설물을 가능하게 했다.

_체계적인 기록

 모든 건설 과정은 『화성성역의궤』에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되었다. 설계도, 예산, 인력 관리, 자재 조달 등 전 과정을 담은 이 기록은 화성의 체계적인 계획을 증명하며, 훗날 완벽한 복원의 기반이 되었다.

# 완벽한 방어 체계와 도시 인프라

성 성곽은 도시의 물리적 방어선이자 행정적 경계였다. 이전 성곽들의 취약점을 철저히 분석하여 방어 기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는 옹성, 성벽 접근을 차단하는 치성, 그리고 대포를 숨긴 포루(砲樓) 등은 적의 공격을 입체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장치였다.

특히 화성에만 존재하는 공심돈은 감시와 공격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다기능 요새였으며, 방화수류정과 같은 각루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동시에 주변을 조망하는 핵심 지휘소의 역할을 했다. 또한, 성 내부에는 주요 거점을 잇는 십자 도로망을 구축하여 도시의 유기적인 기능을 확보했다.

# 사람이 모이는 자립 도시

정조는 도시의 핵심이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는 파격적인 경제 및 사회 정책으로 수원을 사람이 모여드는 자립 도시로 만들었다.

_경제 활성화

국고를 풀어 상인들에게 저리로 자본을 대여하고, 대규모 시장을 조성해 상업 중심지로 육성했다. 또한 만석거와 같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 생산 기반을 안정시켰다.

_애민(愛民) 정책

강제 부역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모든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했다. 이는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 혁신이었으며, 백성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냈다. 무더위에는 척서단이란 약을 하사하고, 성벽 경로를 수정하면서까지 기존 거주민을 성 안으로 포용하는 등 백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펼쳤다.

_인재 유치

수원 지역민을 위한 특별 과거 시험을 시행하여 지역 인재를 등용하고, 이주민에게 세금 감면 등 각종 혜택을 부여하여 인구 유입을 촉진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국가 경영 철학이 집약된 유기적인 도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는 견고한 방어 체계를 넘어, 경제적 자립 기반과 포용적 사회 시스템을 갖춘 이상적인 도시를 목표로 했다. 화성은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 조선 후기 개혁 군주가 제시한 가장 성공적인 계획도시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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