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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와 사상

실학(實學)사상의 등장 배경과 핵심 주장

cocolivingdiary 2025. 9. 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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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목민심서 중 본문, 출처 : 정약용(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549)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은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에 치우쳐,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것은 공허한 학문, 허학(虛學)이다!"라는 날 선 비판과 함께, 실학(實學)이 새로운 학문적 흐름으로 등장했다. 실학은 단어 그대로 '실제적인 쓰임이 있는 참된 학문'으로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의 삶을 구제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 중농학파와 북학파

실학은 문제 해결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개의 학파로 나뉜다. 하나는 토지 제도를 중심으로 사회 전반의 개혁을 주장한 중농학파(重農學派)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상공업 발전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려 한 북학파(北學派)다.

_토지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다, 중농학파

중농학파는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바로 세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소수 지주에게 토지가 집중(겸병)되어 다수 농민이 생계 기반을 잃고 유민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가장 큰 사회 문제로 진단했다.

  • 유형원
    실학의 문을 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대표 저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공전제(公田制)를 주장했다. 이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뒤, 신분과 직책에 따라 차등적으로 재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자는 급진적인 개혁안이었다.
  • 이익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을 학문적 체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법으로 정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시했다. 한 가구가 생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토지는 매매를 금지하여, 농민의 완전한 몰락을 방지하고자 했다

_상공업과 기술에서 미래를 보다, 북학파

북학파는 주로 북경(北京,베이징)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北學)을 주창했다. 이들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기치를 내걸고 상공업의 육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 박지원 
    그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편리한 도구의 사용(利用)이 있어야 백성의 삶이 넉넉해지고(厚生), 그런 뒤에야 바른 도덕(正德)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레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는 등 상공업 촉진을 위한 기반 시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박제가
    그 역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하였던 상업에 주목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레, 선박, 도로 등의 기반 시설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은 중농학파 학자이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영향 또한 받아들여 실학사상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포함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 저술을 통해 조선 사회 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_토지 제도 개혁

그는 시기에 따라 점차 발전된 형태의 토지 개혁안을 제시했다.

  • 여전제(閭田制)
    1798년 「전론(田論)」에서 주장한 제도로, 약 30가구 정도를 하나의 '여(閭)'라는 단위로 묶는다. 여의 토지는 여민(閭民)이 공동으로 노동하여 경작하고 수확한다. 여의 지도자인 여장(閭長)은 매일의 노동량을 '일역부(日役簿)'에 기록했다가, 가을에 국가에 낼 세금과 여장의 봉급을 제외한 수확물을 각자의 노동량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방식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얻는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 정전제(井田制)
    1817년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제시한 제도로, 국가 재정으로 사유 농지를 사들여 전체 농지의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만들고, 이 공전을 백성의 노동력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로 세금을 충당하자는 구상이다. 이는 조세 개혁의 성격이 강했다.
  • 정치 및 행정 개혁
    그는 소수의 벌열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를 비판하며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관료 기구 개혁안을 마련했다.
    • 권력 구조 개편
      비변사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켜, 왕을 정점으로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적으로 행사되는 행정 체계를 구상했다.
    • 과거제 개혁
      부정기 시험을 모두 폐지하고, 시험 과목에 우리 역사, 실무 행정 관련 잡학 등을 추가하여 관료의 실무 능력을 높이고자 했다.
    • 목민관의 역할
      그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책무와 통치 기술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수신(修身)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牧民)이라 강조하며, 수령이 청렴과 절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기술 및 산업 진흥
    그는 선진 기술을 과감히 수용하여 생산력을 높여야 국부가 증대된다고 보았다.
    • 기술 도입
      중국으로부터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술도입과 개발을 책임지는 '이용감(利用監)'과 같은 전문 관청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 상공업 진흥
      상업을 천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상인에 대한 관직 진출을 금지하는 금고법의 철폐를 주장했다. 또한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고, 국가가 광산을 직접 관리하는 국영 광업 정책을 제시했다.

실학의 의의와 한계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가 직면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 사상이었다. 성리학의 교조화된 틀에서 벗어나 현실에 기반한 대안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대부분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그들의 주장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지배층의 반대에 부딪혔다. 정약용 스스로도 자신의 개혁안을 직접 추진할 수 없었기에, 그의 개혁안에는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과정에 대한 대안이 부족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비록 당대에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해결하기 위해 고뇌했던 실학의 정신은, 이후 자주적 근대 사상가들에게 정신적 원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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