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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메모장
한국의 인장 역사는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세 개를 받았다는 단군신화 혹은 단군고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오래되었다. 문자를 사용하고 기록하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인장은 개인 간의 신뢰의 표식을 넘어 국가 통치 체제의 핵심적인 증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왕이 사용하는 국새부터 관료들의 관인, 일반 개인의 사인에 이르기까지, 인장은 그 종류와 형태, 재료, 서체를 통해 당시의 사회 질서와 계급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 글은 한국의 인장 문화를 세 가지 핵심적인 축, 즉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역할,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는 재료와 서체를 중심으로 알아가고자 한다.# 신분과 권위의 상징_인장의 종류와 체계한국의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보인, 관인, 사인의 세 가지 체계로 명확..
시조(時調)는 고려 후기에 형성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창작되고 있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定型詩)이다. 본래 ‘시절가(時節歌)’,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음악적 의미에서 출발한 시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 갈래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시조는 장구장단이나 무릎장단에 맞춰 부르는 노래(시조창)이자, 선비들의 정신 세계와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문학이자 문화였다. 시조는 엄격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시대의 변화와 작가층의 확대에 따라 그 내용을 유연하게 담아내는 뛰어난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먼저 시조가 가진 ‘3장 6구 45자 내외’라는 독특한 형식적 특징을 분석하고, 이어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시조의 역사를 이끌었던 주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시조 ..
탈은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모양을 본떠 얼굴에 쓰는 도구로, 세계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문화이다. 한국의 탈 역시 선사시대 유물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종교의식 속에서 신령이나 악귀를 쫓는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탈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노래와 춤 그리고 연극이 결합된 예능의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 지역에서 탈놀이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당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고 지배 계층의 위선을 폭로하는 사회 비판의 장으로 기능했다. 탈을 통해 신분을 감춘 서민들은 놀이판 위에서만큼은 양반과 파계승을 마음껏 조롱하며 억눌렸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 글은 조선 시대 후기 유교의 엄격한 사회..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되던 음악이다. 기악, 악장(樂章), 일무(佾舞)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며 왕조의 정통성과 업적을 기리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소리와 몸짓으로 구현하는 장엄한 의식이었다. 고려시대의 제도를 일부 계승했으나, 조선의 건국이념과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담아내기 위한 노력은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신악의 창제로 이어졌다. 세종이 만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 세조 대에 종묘제례악으로 공식 채택된 이후, 종묘제례악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원형 그대로 전승되어 왔다. 그 독창성과 오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창자, 唱者)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한국의 전통 공연 예술이다. 소리꾼은 단순히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창(唱, 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발림, 몸짓)라는 세 가지 요소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거대한 서사를 이끌어간다. 청중 또한 "얼씨구", "좋다"와 같은 추임새로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소리꾼과 함께 판을 완성해 나간다. 조선 후기 민중의 삶 속에서 태동한 판소리는 시대의 희로애락을 해학과 풍자로 담아내며 모든 계층이 사랑하는 예술로 발전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낸 판소리는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글은 판소리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을 살펴보고, 현재까지 전승되는 ..
고려에는 청자가 있다면 조선에는 백자(白磁)가 있었다. 고려 말 상감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분청사기가 조선 초기에 생산되었으나, 15세기 중반 이후 왕실과 관청을 중심으로 백자의 생산과 사용이 확대되었다. 이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검소하고 실용적인 가치를 중시한 시대적 배경과, 높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마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순백의 대형 항아리인 달항아리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조선백자의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조선백자의 성립과 발전 과정고려시대 청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백자는 조선 건국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백자는 점차 도자기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_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우리나라에서..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의 문화적 취향과 당시 도자 기술의 성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물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자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고려청자는 12~13세기에 이르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며 절정에 달했다. 특히 다른 나라의 도자기와 구별되는 고려청자만의 독보적인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신비로운 푸른빛을 띠는 유약의 색, 즉 비색(翡色)이며, 다른 하나는 흙으로 그림을 그리듯 정교한 문양을 새겨 넣는 상감(象嵌) 기법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고려인의 미의식과 창의성을 담고 있다. 비색을 구현하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과, 상감이라는 독창적인 장식 기법의 완성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려청자가 지닌 예술적, 기술적 가치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국가는 법과 예로 기준을 삼았는데 그중 법치의 근간을 마련한 것이 경국대전이다. 조선은 개국 초(태조 6년)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시작으로 여러 법전들이 편찬되었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조선의 법전으로서 완성되었다. 그렇게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경국대전 편찬의 배경과 과정_편찬 이전의 법전들조선 최초의 법전은 태조 대에 조준 등이 편찬한 『경제육전』이었다. 이는 고려 말부터 시행된 여러 명령과 조례를 정리한 것이었으나, 이후 새로운 법령이 계속 추가되면서 수시로 속편을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태종 대의 『속육전(續六典)』, 세종 대의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