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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불교 행사 팔관회와 연등회 본문

전통/사회와 사상

고려의 불교 행사 팔관회와 연등회

cocolivingdiary 2025. 9. 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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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회
연등회 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51

 

고려가 불교 국가였음은 두 개의 거대한 국가 축제,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를 통해 가장 화려하게 드러났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후대 왕들에게 반드시 거행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을 만큼, 이 두 행사는 고려 500년 내내 왕조의 권위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핵심 의례였다. 매년 겨울이 되면 수도 개경은 이 두 축제를 위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두 행사의 성격은 명확히 달랐다. 팔관회가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종합적 국가 제전이었다면, 연등회는 오직 부처에게 귀의하는 순수한 불교 의례였다. 하나는 통합과 포용을, 다른 하나는 신앙의 순수성을 상징했다. 이 두 축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가 지닌 복합적인 정체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팔관회,불교와 토착 신앙의 만남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 의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성격이 복합적인 행사였다. 단순한 불교 행사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고려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 기원은 팔관재계라는 인도의 불교의 수행 법이였다. 출가를 한

_팔관회의 기원 

팔관회의 기원은 인도의 불교 수행법인 팔관재계(八關齋戒)이다. 이는 출가한 승려가 아닌, 속세에 사는 재가 신도를 위한 수행법이었다. 팔관재계란 정해진 날 하루 동안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등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의식이었다.

이 의례가 중국을 거쳐 대규모 법회로 변모했고, 신라에서 호국적 성격을 띤 국가 행사로 자리 잡았다. 전사한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례로 시행되었다. 고려의 팔관회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되, 그 성격을 더욱 확장했다.

_불교와 토착 신앙의 융합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제6조에서 그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 용신(龍神) 등 토착의 신들을 섬기기 위함이다." 이는 팔관회가 불교의 이름 아래 하늘신, 산신, 강신 등 민족 고유의 신들을 모두 섬기는 통합 의례였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태조 스스로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 공불악신지회)'이라 칭한 것에서도 그 융합적 성격을 알 수 있다.

_왕권 강화와 국제 교류의 장

팔관회는 개경에서 11월 14일(소회)과 15일(대회) 이틀에 걸쳐 열렸다. 그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했다. 왕은 화려한 의장대와 함께 궁을 나와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불보살과 토착신들에게 분향했다. 태조진영을 모신 궁궐 안 의봉문루(儀鳳門樓)에 오르면 태자와 문무백관이 위계에 따라 하례를 올리는 조하(朝賀)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팔관회는 국가 통합과 왕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정치적 장치로 기능했다.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적 질서를 모든 구성원이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행사에는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사신과 상인들까지 참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고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주적 세계관을 과시하는 외교 무대이자, 활발한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는 국제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이 행사를 관리하기 위해 '팔관보(八關寶)'라는 전담 관청이 설치될 정도로 국가적 위상이 높았다.

가무백희

팔관회의 백미는 밤새도록 펼쳐지는 가무백희(歌舞百戲)였다. 이는 춤과 음악, 각종 기예가 어우러진 종합 공연이었다. 신라 화랑의 전통을 이은 사선악부(四仙樂部)의 공연, 용·봉황·코끼리·말 등을 형상화한 거대한 행렬이 펼쳐졌다.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문화 축제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그 막대한 비용과 노역 때문에 최승로와 같은 신하들에게 "번거롭고 잡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연등회, 신앙의 등불

팔관회가 고려의 포용적인 면모를 상징했다면, 연등회는 불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신앙의 축제였다.

 

_연등회의 기원과 의미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은 무명(無明)의 어둠을 밝히는 부처의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중요한 신행 활동이다. 자신의 마음을 밝혀 불법에 귀의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연등 풍속은 신라 시대부터 국가 행사로 열렸으며, 고려에 와서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연등회를 팔관회와 함께 반드시 거행해야 할 중요한 행사로 규정하며 "연등은 오직 부처를 섬기는 것"이라 하여, 그 순수한 불교적 성격을 명확히 했다.

_연등회의 변화

고려 초기의 연등회는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고대 풍속과 결합되어 정월 대보름에 열렸다. 이 또한 성종 때 팔관회와 함께 일시 폐지되었으나 현종 때 부활했으며, 이후 2월 15일로 날짜가 변경되어 이어졌다.
고려 후기로 가면서 석가탄신일인 4월 8일에 연등을 하는 풍속이 점차 중요해졌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 초파일 연등이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았고, 이때부터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아이들이 연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거리를 돌며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생겨난 것은 연등회가 민중의 축제로 깊이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만등회(萬燈會)와 같이 수만 개의 등을 밝히는 장엄한 행사도 기록에 남아있다.

 

_왕실에서 민중으로 퍼진 축제

연등회는 왕이 봉은사(奉恩寺) 등에 행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궁궐에서 사찰에 이르는 길목은 수만 개의 화려한 등으로 장식되었다. 밤이 되면 불빛이 대낮같이 밝았고, 백성들은 등을 보며 마음을 밝히는 관등을 즐겼다. 연등회 역시 '연등도감(燃燈都監)'이라는 국가 기관이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으며, 이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온 나라가 축제에 동참했다.

 

 


요컨대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라는 국가의 복합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두 의례였다. 팔관회는 불교의 틀 안에서 토착 신앙을 포섭하여 국가 통합을 지향한 정치적·문화적 축제였다. 반면 연등회는 국교인 불교에 대한 순수한 신앙심을 드러내는 종교적 축제로서 국가의 정신적 근간을 상징했다. 이처럼 성격이 다른 두 행사가 공존했다는 사실은, 고려가 불교라는 공식 이념을 굳건히 세우면서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존중하고 통합하려 했던 실용적인 통치 철학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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