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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불교의 역할 본문

전통/사회와 사상

고려시대 불교의 역할

cocolivingdiary 2025. 9. 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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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출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9589

고려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불교를 국가의 중심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태봉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등 여러 군주가 불교를 숭상했으며, 이를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의 번영과 통합을 불교의 힘에 의지했다. 그는 후삼국 통일이 오직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믿었고, 이는 고려 왕조 전체의 정책 기조를 결정했다. 불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였으며, 이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라는 국가적 행사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 이 글은 고려 500년 역사 속에서 불교가 어떻게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시대를 따라 변화하며, 마침내 왕조와 운명을 함께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 고려의 국교, 불교

고려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국가 통치의 핵심 기반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불교는 때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호국(護國)의 역할을, 때로는 타락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고려 500년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_건국 이념으로서의 불교

태조 왕건은 즉위 후 불교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는 정책을 확립했다. 그는 『훈요십조(訓要十條)』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가르침을 남겼다. 그 핵심은 불법을 신봉하고 사찰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제1조에서는 국가 대업이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 이루어졌음을 명시했고, 제2조에는 태조는 사찰 건립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담았다. 도선이 지정한 터를 제외하고 함부로 절을 짓지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땅의 모양이나 기운이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지리도참사상에 따른 것이다. 이를 톻해 불교가 국가의 안녕과 직결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등 10개의 사찰을 세우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를 두어 고승들을 우대하며 정치적 자문을 구했다.

 

_국가적 후원과 발전

태조의 숭불 정책은 후대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에 대한 몇가지 예를 알아보자.

  • 광종
    958년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국가고시인 승과(僧科)를 도입했다. 이는 승려에게 교종과 선종에 따른 법계(法階)를 부여하고 국가가 불교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로, 고려 말까지 이어졌다. 또한 그는 분열된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하며 균여(均如), 제관(諦觀)과 같은 고승들을 후원했다.
  • 현종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불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조판을 시작했다. 이는 불교가 국가를 수호한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성종 때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켜 국가적 행사로 정착시켰다.

이처럼 고려 왕실은 사찰 건립, 불경 간행, 대규모 불교 행사 개최 등을 통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왕자 중 한 명을 출가시키는 관행이 있었고, 왕들은 불교에서 보살이 실천해야 하는 계율인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왕이 이 계를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신앙을 넘어,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다짐하는 행위였다. 즉,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로써 백성을 보살피는 군주가 되겠다고 국가적으로 공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왕은 자신의 통치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 고려가 불교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_불교의 타락과 정화 운동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사원 세력은 점차 비대해졌고, 여러 모순을 드러냈다. 문종 대의 교서에는 승려들이 부역을 피하기 위해 출가하여 재산을 모으고, 장사나 목축에 종사하며, 계율을 어기는 모습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사원의 부패와 세속화는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불교를 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의천(義天)
    당시 고려 불교계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경전을 공부하며 교리를 파고드는 교종(敎宗)이었고, 다른 하나는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선종(禪宗)이었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은 송나라에서 천태학과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와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종파인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했다. 그는 이론 공부와 참선 수행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는 교관병수(敎觀幷修)를 내세우며 이론(교종)과 실천(선종)의 조화를 통해 분열된 불교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기존 대장경에 빠져있던 중요한 불교 서적들을 국내외에서 모아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여 불교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 지눌(知訥)
    무신집권기의 혼란 속에서 고려 불교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지눌은 그는 뜻이 맞는 스님들을 모아 송광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통해 불교 본연의 수행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참선을 통해 마음을 고요히 집중시키는 선정과 경전을 통해 얻는 지혜는 분리될 수 없으므로 함께 닦아야 한다는 원칙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깨달음은 문득 찾아오지만, 그 후에도 꾸준한 수행으로 다듬어 가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창하며 고려 불교의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이후 지눌의 사상은 한국 불교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_고려 불교의 쇠퇴

지눌과 같은 고승들의 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 간섭기를 거치며 심화된 불교계의 폐단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몽골 침략기에 다시 한번 팔만대장경을 완성하며 호국 의지를 다졌으나, 지배층과 결탁한 불교는 점차 개혁의 동력을 잃어갔다. 고려 말, 새롭게 등장한 지배 세력인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다. 정도전과 같은 인물들은 불교가 현실 세계의 문제를 외면하는 공허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며, 사원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국가 경제를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비판은 배불론(排佛論), 즉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이 흐름은 새 왕조를 열려는 정치 세력의 핵심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결국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반이자 억불(抑佛) 정책의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 불교는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국가 이념으로 시작했다. 왕실의 비호 아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국난의 시기에는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과의 긴밀한 유착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불교는 자신을 비판하며 등장한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에 주도권을 내주며, 고려 왕조와 함께 그 운명을 마감했다. 불교의 쇠퇴는 한 왕조의 몰락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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