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창작메모장

고려 금속활자와 직지 본문

전통/기술

고려 금속활자와 직지

cocolivingdiary 2025. 8. 23. 22:00
반응형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공공누리(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71648&division=img#)

금속활자 인쇄술은 인류의 지식 보급과 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혁신적인 기술이다. 목판 인쇄의 시간적·경제적 한계를 극복한 이 기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실용화한 국가는 바로 고려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는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최소 78년 앞선 고려의 독창적인 기술력을 증명하는 결정적 유물이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우연한 발명품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필요와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기술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 금속활자가 발명될 수 있었던 기반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준비된 기술력과 절박한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그 배경을 자세히 알아보자

 

_준비된 기술들

_인쇄 및 주조 기술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증명된 정교한 인쇄술과, 거대한 청동 범종이나 철불상을 한 번에 거푸집으로 부어 만드는 고도의 금속 주조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_화폐를 만들며 쌓은 경험

고려시대의 국가 기관 화폐주조기관인 주전관()에서는 고주법이라 하는 기술로 화폐를 만들었다. 고주법이란 높은 온도에 금속을 녹여 거푸집에 부은  식혀 기물을 만드는 기술로 화폐를 제조하며 발전된 기술은 활자 주조의 원천 기술이 되었다. 

_재료의 완비

세계적 수준의 종이인 한지, 그리고 금속에 잘 묻고 번지지 않는 유연먹(油煙墨)의 존재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실용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다.

 

_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 계기

고려는 이미 금속활자 발명에 필요한 모든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 역사적 계기는 12세기 후반부터 고려는 무신의 난과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과정에서 수많은 귀중 서적이 불타 소실되었다. 복구하는 과정에서 늘어나는 서적 수요를 목판 인쇄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목판은 한번 새기면 다른 책을 찍을 수 없고, 제작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어 다품종 소량 인쇄에는 비효율적이었다. 한번 만들면 글자를 재조합하여 여러 종류의 책을 필요할 때마다 찍어낼 수 있는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러한 시대적 난제를 해결할 가장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대안이었다. 이처럼 고려의 금속활자는 기술, 재료, 필요성이라는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혁신의 산물이었다

 

# 세계 최초라는 증거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는 구텐베르크보다 약 200년 앞선 13세기 초부터 실행되었음이 명확한 문헌 기록과 실물 유물을 통해 증명된다.

 

_13세기 문헌 기록

『직지』보다 앞서 금속활자의 실용화를 증명하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_『상정고금예문』 (1234~1241년경)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몽골과의 전쟁 중 강화도에서 국가의 중요 예법 서적인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주자(鑄字), 즉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여러 관청에 보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전란 속에서도 국가의 중요 서적을 신속하게 인쇄할 만큼 기술이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_『남명천화상송증도가』 (1239년 이전)

 이 책의 목판본 권말에는 최이가 쓴 발문이 있는데, "기존에 있던 주자본(鑄字本)을 바탕으로 다시 목판에 새긴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123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증거다.

 

_현존 최고(最古)의 증거, 『직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는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을 실물로 증명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직지』의 다소 거칠고 불규칙한 인쇄 상태는 오히려 초기 금속활자 기술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글자의 먹색이 고르지 않고 글줄이 비뚤어져 있으며, 한 인쇄면 안에서도 동일한 글자의 모양이 제각기 다르다. 이러한 특징은『직지』가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으로 제작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는 밀랍으로 활자 모형을 만든 뒤 내화성 흙으로 감싸 주형(거푸집)을 만들고,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낸 공간에 쇳물을 붓는 방식이다. 주형을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어 동일한 활자를 대량생산하기는 어렵지만, 고려 사찰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금속 주조법이었다.

 

# 기술의 진화: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려에서 발명된 금속활자 기술은 조선 왕조로 계승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발전하며 세계 인쇄사상 유례없는 기술적 정점에 도달했다.

고려의 활자와 조선의 혁신

고려 활자의 실물로는 개성에서 출토된 '복(㠅)'자 활자가 있다. 이 활자는 뒷면이 옴폭 파여 있는데, 인쇄 시 밀랍으로 고정하고 동의 소모량을 줄이려 한 흔적으로, 초기 기술의 특징과 개량의 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조선은 1403년(태종 3) 국가 기관인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며 금속활자 기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_계미자(1403년)

 조선 최초의 활자. 고려의 밀랍주조법을 계승했으나 아직 기술이 미숙했다.

_경자자(1420년)

 세종의 주도로 이루어진 첫 개량. 활자와 조판용 동판을 정교하게 만들어 밀랍 사용을 최소화했고, 인쇄 능률을 하루 수 장에서 20여 장으로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_갑인자(1434년)

 조선 금속활자 기술의 정점. 활자의 크기와 모양을 완벽하게 규격화한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을 완성했다. 이는 나무로 만든 어미자(字母)를 고운 모래(주물사) 틀에 찍어 거푸집을 만들고 쇳물을 부어 동일한 활자를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밀랍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완전 조립식 조판이 가능해졌고, 인쇄의 질과 속도 모두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때 처음으로 한글 활자가 함께 주조되었다.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을 완성했다 활자의 크기와 모양을 완벽하게 규격화하였으며 이는 조선 금속활자 기술의 정점이였다. 이 방식은 목제 어미자(字母)로 고운 모래 틀에 자국을 내고 쇳물을 부어, 균일한 품질과 형태의 활자를 대량 복제하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활자를 밀랍으로 고정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빈틈을 메우는 완전한 조립식 판짜기가 가능해졌다. 그 결과 인쇄의 정교함과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역사상 최초의 한글 활자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다.

# 역사적 의의와 영향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과 『직지』는 인류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이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성서(1455년경)보다 최소 78년, 문헌 기록상으로는 약 200년 이상 앞선 세계 최초의 기술 혁신이었다. 금속활자는 목판에 비해 훨씬 빠르고 경제적으로 다양한 서적을 출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식의 대량 보급 시대를 열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에는 경서, 역사서, 의학서, 법률서 등 방대한 양의 서적이 간행되어 국가 경영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려에서 발명되고 조선에서 꽃피운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후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며 동아시아 인쇄 문화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자료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출처: 금속활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