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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축조 기술의 발전 과정 본문

전통/기술

한국의 성곽 축조 기술의 발전 과정

cocolivingdiary 2025. 8. 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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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출처: 성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출처: 성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189#section-6

성곽(城郭)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방어 구조물이다. 한반도에서는 국가의 형성과 함께 성곽이 등장했으며, 시대의 흐름과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그 재료와 구조, 전략적 가치를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특히 한국의 성곽은 정형화된 형태를 고집하기보다 자연 지형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고려했으며, 이는 독자적인 축성 기술과 방어 체계를 낳는 기반이 되었다. 이번에는 우리 고유어로는 이라 불렸던 성곽의 역사를 흙과 돌, 그리고 나무를 다루는 기술의 변천사와 함께 알아볼 것이다. 

# 축조 재료와 공법으로 본 성곽의 유형

 

 _토성과 토축성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가장 초기적인 형태다. 토성은 주로 판축 공법, 즉 나무틀 안에 흙을 켜켜이 넣고 단단히 다지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반면, 토축성기존 지형의 흙을 깎아내고 다져서 성벽의 일부로 삼는 삭토 등의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신속한 축조가 가능했지만, 비바람에 취약하고 불을 이용한 공격에 약한 단점이 있었다. 백제의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대표적이다.

_석성과 석축성

 돌로 쌓은 성곽으로, 삼국시대 이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방식이었으나, 점차 돌을 네모반듯하게 가공하여 정교하게 쌓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석성은 압도적인 내구성을 자랑했지만, 긴 공사 기간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_벽돌성

벽돌로 쌓은 성곽이다. 한국에서는 성곽 전체를 벽돌로만 쌓은 경우는 드물고, 수원화성처럼 석성과 혼합하여 중요 시설물에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_목책과 목익

목책은 말뚝을 촘촘히 박아 만든 울타리 형태의 방어선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무의 가지 부분까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여 더욱 견고하게 엮은 것을 목익 또는 녹각성이라 불렀다. 여기에 진흙을 발라 담장처럼 만든 목책도니성도 있었다.

 

# 한국 성곽의 구조적 및 전략적 특징

 

한국 성곽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성벽을 쌓는 기술에만 있지 않다. 지형을 읽고 활용하는 지혜와 적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구조 설계에 그 핵심이 있다. 한국 성곽은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산성(山城)이 주를 이룬다.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불규칙한 형태로 축조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최소한의 공력으로 최대의 방어 효과를 얻기 위함이었다. 특히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높은 산, 즉 규봉을 피해 입지를 선정하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축성 방식으로는 성벽 바깥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내탁 공법이 널리 쓰였는데, 이는 험준한 산지에서 공사 비용과 기간을 줄이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성벽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부속 시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_성황

성벽의 가장 바깥에는 깊은 도랑인 해자를 파서 적의 접근을 일차적으로 저지했다.

_성문

성의 출입구인 성문은 방어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기에 여러 장치가 고안되었다. 문 안팎을 S자 형태로 굽이치게 만든 곡행문들어 올리는 다리인 조교 형태의 현문, 그리고 튼튼한 구조의 아치문 등이 있었다.

_옹성

성문 앞을 항아리처럼 감싸는 반원형 또는 사각형의 외벽으로, 성문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측면에서 적을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_치성과 현안

성벽 일부를 돌출시킨 치성은 성벽에 붙은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시설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성벽 맨 윗부분의 돌출된 미석이란 돌에 구멍을 뚫어, 성벽 바로 아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 현안이다.

_여장과 사혈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은 병사들의 몸을 보호했다. 여장에는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구멍인 사혈, 즉 총안이나 타구가 뚫려 있었다.

_암문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은밀한 위치에 설치한 작은 비밀 통로로, 기습 공격이나 비상시 탈출로로 활용되었다.

 

한국의 산성들은 독립적인 형태가 아닌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여러 개가 함께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가 많았던 이유는 하나의 성이 공격받을 때 인근의 다른 성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햐서 였다. 즉 앞뒤에서 적을 몰아치는 고도의 협력 방어 전술이다.

# 시대의 흐름과 성곽 기술의 변천

삼국시대

평시에는 평지성에, 전시에는 배후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산성입보 체제가 정착되었다.

통일신라 ~ 고려

수도를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을 갖춘 도성제가 발달하고, 지방의 행정 중심지인 **읍성(邑城)**이 정비되었다.

조선시대:

화포의 등장은 성곽 기술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포격에 견디기 위해 성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옹성, 해자 등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정점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화성은 전통적인 석성 축조 기술에 벽돌, 거중기 등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결합하고, 공심돈, 포루 등 독창적인 시설을 완비하여 한국 성곽 기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결론

한국의 성곽은 단순한 방어벽을 넘어, 그 시대의 정치, 군사, 기술, 그리고 자연관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역사적 산물이다. 흙과 나무로 시작하여 돌과 벽돌로 진화하고, 지형을 읽고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수많은 방어 시설을 고안해낸 과정은 그 자체가 치열한 생존과 지혜의 역사다. 성곽에 담긴 정교한 용어들과 체계적인 구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선조들의 뛰어난 공학 기술과 전략적 사고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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