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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학부, 성균관의 생활 본문

전통/사회와 사상

조선 최고 학부, 성균관의 생활

cocolivingdiary 2025. 9. 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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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은행나무, 서울 문묘 나무
출처 :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iLUv1MrzKMexPDIxO1LG9ncE6aaaFt8SBPBGsi1G7adae1ualCemlEBvWrO1ayw1.cpawas2_servlet_engine1?pageNo=1_1_2_0&ccbaCpno=13611005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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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은 정규 교육 과정 이수와 더불어, 기숙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자치 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재회(齋會)'라는 자치 기구를 조직하여 내부 규율을 정했고, '유소(儒疏)'나 '권당(捲堂)'과 같은 집단행동을 통해 국가 정책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이러한 자치 및 정치 활동은 공식 학제와 함께, 유생들이 향후 관료로서 필요한 공동체 운영 능력과 정치적 소양을 함양하는 과정으로 기능했다.


#유생들의 생활공간

_유생로서의 생활

성균관 유생들의 삶은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학문을 토론하고 공동체의 규칙을 배우며 미래의 동료들과 관계를 맺는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유생들은 의식주 일체를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관비생(官費生)이었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은 국가가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유생들이 오직 학업과 자기 수양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 주었다.

_유생의 특권을 뒷받침한 공간 반촌

이들의 특권적인 일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균관 바로 앞에 위치한 반촌(泮村)과 그곳에 사는 반인(泮人)들이었다. 반인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집단이었다. 고려 말 안향이 기증한 사노비의 후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반촌에 모여 살며 문묘 관리, 청소, 시설 보수, 그리고 식재료(특히 문묘제향에 쓰일 쇠고기) 공급 등 성균관의 모든 잡무를 처리했다. 유생들은 반인들의 노동력 위에서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이는 성균관이라는 공간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 집단과 이들을 뒷받침하는 특수한 천인 집단이 공존하는 독특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 재회와 권당

성균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법으로 보장된 강력한 자치 시스템이었다. 유생들은 재회(齋會)라 불리는 학생 자치 기구를 통해 내부의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운영했다.

_자치 기구 '재회'

유생들은 재회라 불리는 학생 자치 기구를 통해 내부의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운영했다. 회장 격인 장의를 비롯한 임원들을 선출하여 기숙사의 운영 규칙을 정하고 유생들의 기강을 잡았다. 이러한 자치 활동은 유생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배우고, 장차 관료가 되어 조직을 이끌어가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었다.

_국정을 움직인 집단행동

성균관 유생들은 단순한 학생으로서 활동한 것을 넘어, 조선의 여론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치기구인 '재회'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뜻을 모으고, 때로는 목숨을 건 집단행동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 유소(儒疏)
    유생 전체의 이름으로 왕에게 올리는 집단 상소였다.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유소를 올렸다. 나라의 정책이나 관료의 처벌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 훌륭한 업적을 남긴 과거의 학자를 국가의 공식적인 성현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때, (문묘 종사) 성리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다른 사상(불교, 도교 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유생들은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이는 왕과 조정에 큰 정치적, 도덕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 권당(捲堂)과 공관(空館)
    유소로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유생들은 더욱 강력한 실력행사에 나섰다. 권당은 식사를 거부하고 명륜당에 모여 앉아 벌이는 단식 투쟁이었고, 공관은 모든 유생이 기숙사를 비우고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동맹 휴학이었다.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 텅 비는 사태는 왕과 조정의 권위에 큰 흠집을 내는 행위였기에, 이는 가장 강력한 저항 수단이었다. 후기로 가면서 이러한 집단행동이 당파 싸움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폐단도 있었으나, 성균관이 살아있는 비판 세력이자 여론 형성의 중심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 유생들의 놀이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유생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놀이 문화를 즐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궐희(闕戱)라 불리는 모의 조정 놀이였다. 고려 말부터 이어진 이 유서 깊은 놀이는 매년 여름과 겨울에 성대하게 펼쳐졌다. 유생들은 문묘에 모신 공자를 천자(天子)로, 성균관을 천자의 대궐로 상정 했다. 그리고 자신들 중에서 추천을 통해 종이로 만든 관직의 상징물(옥관자, 깃 등)을 착용하고 재상, 장수, 판서 등 모든 관직을 맡아 실제 조정처럼 국정을 운영했다. 죄인을 심문하고, 국가의 중대사인 천도(遷都)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때 한성의 사부 학당인 동학, 남학, 중학, 서학은 각각 공자의 제자인 안회, 자사, 증자, 맹자의 나라, 즉 제후국 역할을 맡아 성균관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면 성균관에서는 이들 '제후국'에 천자(공자)의 사신을 파견했는데, 중국인 흉내를 내며 거리를 행진하는 사신 행렬은 백성들에게 큰 구경거리였다. 궐희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유생들이 국가의 관직 체계와 정치 운영 방식을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익히는 즐거운 교육의 장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교육 외에도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유생들은 재회를 통해 자치 행정을, 유소와 권당을 통해 집단적 정치 의사 표현을 실습했으며, 궐희와 같은 모의 국정 운영을 통해 관료에게 필요한 소양을 익혔다. 이처럼 성균관은 학문, 자치, 정치 활동이 결합된 교육 과정을 통해, 지식인을 넘어 국가 시스템을 운영할 예비 관료를 양성하는 핵심 기관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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