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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메모장
고려에는 청자가 있다면 조선에는 백자(白磁)가 있었다. 고려 말 상감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분청사기가 조선 초기에 생산되었으나, 15세기 중반 이후 왕실과 관청을 중심으로 백자의 생산과 사용이 확대되었다. 이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검소하고 실용적인 가치를 중시한 시대적 배경과, 높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마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순백의 대형 항아리인 달항아리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조선백자의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조선백자의 성립과 발전 과정고려시대 청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백자는 조선 건국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백자는 점차 도자기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_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우리나라에서..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의 문화적 취향과 당시 도자 기술의 성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물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자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고려청자는 12~13세기에 이르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며 절정에 달했다. 특히 다른 나라의 도자기와 구별되는 고려청자만의 독보적인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신비로운 푸른빛을 띠는 유약의 색, 즉 비색(翡色)이며, 다른 하나는 흙으로 그림을 그리듯 정교한 문양을 새겨 넣는 상감(象嵌) 기법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고려인의 미의식과 창의성을 담고 있다. 비색을 구현하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과, 상감이라는 독창적인 장식 기법의 완성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려청자가 지닌 예술적, 기술적 가치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국가는 법과 예로 기준을 삼았는데 그중 법치의 근간을 마련한 것이 경국대전이다. 조선은 개국 초(태조 6년)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시작으로 여러 법전들이 편찬되었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조선의 법전으로서 완성되었다. 그렇게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경국대전 편찬의 배경과 과정_편찬 이전의 법전들조선 최초의 법전은 태조 대에 조준 등이 편찬한 『경제육전』이었다. 이는 고려 말부터 시행된 여러 명령과 조례를 정리한 것이었으나, 이후 새로운 법령이 계속 추가되면서 수시로 속편을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태종 대의 『속육전(續六典)』, 세종 대의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이전 이야기 - 유향소, 향안, 향회, 조선 향촌 사회의 지배 구조조선시대 향촌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향약(鄕約)을 알아야 한다. 향약의 향존규약의 준말로 지방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다. 향약은 유교적 예절을 보급하고 재난 시 서로 돕는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내걸었지만실제로는 향촌 지배층인 사족(士族)의 질서 유지와 통제 수단으로 기능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사림파가 도입한 이상적인 규약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현실적인 제도로 변모하며 향촌 사회에 뿌리내렸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 향약의 도입과 조선적 변용조선 중기, 향약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士林)의 손에 의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핵심 도구로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_..
조선시대의 지방 사회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었다. 수령의 행정력 밖에는, 향촌에 깊이 뿌리내린 토착 지배 계층, 즉 사족(士族)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체계가 존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조선 지방 자치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중심축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족들의 공식적인 자치 기구였던 유향소(留鄕所), 그 구성원의 자격을 규정한 폐쇄적인 명단인 향안(鄕案), 그리고 실질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던 단체, 향회(鄕會)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긴밀히 얽혀 조선 향촌 사회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했다. # 유향소, 지방 사족의 공식 기구유향소는 향..
이전편, 조선 최고 교육기관, 학제편 성균관 유생들은 정규 교육 과정 이수와 더불어, 기숙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자치 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재회(齋會)'라는 자치 기구를 조직하여 내부 규율을 정했고, '유소(儒疏)'나 '권당(捲堂)'과 같은 집단행동을 통해 국가 정책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이러한 자치 및 정치 활동은 공식 학제와 함께, 유생들이 향후 관료로서 필요한 공동체 운영 능력과 정치적 소양을 함양하는 과정으로 기능했다.#유생들의 생활공간_유생로서의 생활성균관 유생들의 삶은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학문을 토론하고 공동체의 규칙을 배우며 미래의 동료들과 관계를 맺는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유생들은 의식주 일체를 국가로부터 제..
조선 왕조의 근간을 이룬 것은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 관료들이었다. 이들을 길러낸 공식적이고 유일한 최고 교육기관이 바로 성균관(成均館)이었다. 성균관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곳을 넘어, 입학부터 졸업(혹은 과거 급제)까지 모든 과정이 국가의 엄격한 시스템 아래 관리되었다. 이곳의 학제는 장차 나라를 이끌 인재들에게 요구되었던 소양과 자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성균관 유생이 되는 법성균관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양반 사대부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으나, 입학을 위해서는 정해진 자격을 반드시 갖추어야 했다.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대에 20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후 입학 정원은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_입학 자격『경국대전』에 명시된 입학 ..
고려가 불교 국가였음은 두 개의 거대한 국가 축제,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통해 가장 화려하게 드러났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후대 왕들에게 반드시 거행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을 만큼, 이 두 행사는 고려 500년 내내 왕조의 권위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핵심 의례였다. 매년 겨울이 되면 수도 개경은 이 두 축제를 위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두 행사의 성격은 명확히 달랐다. 팔관회가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종합적 국가 제전이었다면, 연등회는 오직 부처에게 귀의하는 순수한 불교 의례였다. 하나는 통합과 포용을, 다른 하나는 신앙의 순수성을 상징했다. 이 두 축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가 지닌 복합적인 정체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팔관회,..